생명의 열기를 거부하는 자, 굶어라
나기연
부추는 물을 많이 먹는다. 물뿌리개 통을 가득 채워 10번은 왕복해야 땅이 젖는다. 양손에 들고 왔다 갔다 하니 한 궤짝이 물 20통을 먹는 것이다. 딱딱한 토양이 폭실폭실 해질 때까지 물을 콸콸 쏟아 넣으며 작열하는 태양에 몸을 맡긴다. 차가운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는 덕에 부추 근처에만 아주 조금 냉기가 돈다. 콸콸콸콸. 물뿌리개 통이 점점 가벼워진다. 궤짝이 물을 다 먹자 냉기도 금세 사라진다. 가벼워진 통을 양손에 들고 다시 물을 길으러 간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이 한 몸에 져야 할 것이 참 많아진다. 삽과 호미와 비닐을 손에 져야 하고 퇴비와 비료와 살충제를 어깨에 져야 하고 폭우와 바람과 태양을 등에 져야 한다. 신발 끈을 아무리 잘 묶어도 농사일 한 번이면 발가락 사이사이로 흙이 들어온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햇살이 요란스럽다. 우드드드득. 등에서 뼈 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나지막한 한숨이 열기 사이로 퍼져나간다.
더운 공기는 위로 향한다. 사람의 숨도 위로 퍼진다. 사람은 땅에서 나고 자라니 그 숨이 하늘까지 닿을 일은 없다. 사람에게 필요하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것은 전부 땅에 더 가깝다. 이건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숨 막히는 더위는 위로, 온화한 열기는 아래로 간다. 물론 지구는 찜질방이나 사우나처럼 인간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서 자연의 온화함이 사람에게는 조금 힘들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지구에는 복사열이라는 것이 있어 태양이 있는 한 땅도 뜨겁다. 그래도 아스팔트의 지열보다는 흙의 지열이 더 온화하니 농지에서는 열기에도 감사하며 물이나 깃는 게 옳다.
“그럼 비 오는 날에는? 흙의 열기만큼은 잦아드는데 감사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럴 리가. 그때는 영양을 품고 젖어드는 땅에 감사해야지. “뭐야. 그럼 겨울에는 감사하지 않아도 돼?” 그럴 리가. 그때는 생명을 품은 땅의 인내에 감사해야지. “아, 그럼 냉커피라도 주던가!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야!” 불퉁한 소리는 무시하고 잡초를 뽑는다. 유기물이 풍부한 흙은 식물을 키울 때 가장 귀한 존재다. 잡초 뿌리에 붙은 것마저 소중하다. 뿌리에서 탈탈 턴 흙을 다시 작물의 곁으로 보내고, 앙상해진 잡초만 뿌리째로 저 멀리 던진다. 대충 던졌다가는 다시 농지에 뿌리를 내린다. 식물의 생존력이란 그런 것이다. 대충 던져놓아도 뿌리를 내리는 것. 놔두면 어느새 돌아오는 것.
하지만 인간이 키우는 작물은 그보다 섬세하다. 잡초처럼 근처에 던져 놓는다고 잘 자라주지 않는다. 사람이 있어야 식물이 큰다는 건방진 소리가 아니다. ‘인간이 원하는 만큼' 식물을 키우기 위해 인간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니 부단히 애써야 한다. 식량을 얻기 위해서 비가 내리기 전에 물을 줘야 하고 땅 위에 비료를 뿌려야 하며 병충해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아는 그 튼실한 채소는 나오지 않는다. 성장은 노동에서 나온다. 노동 없는 결실은 없다. 이제는 성장과 결실이 유리되어도 잘 살 수 있는 시대라지만, 송금만 하면 세척된 파와 마늘과 상추와 각종 채소가 집 앞에 놓이는 세상에서 사람이 놓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덥지 않고 힘들이지 않고 마법처럼 등장하는 결실을 왜 의심하지 않는가. 아, 입이 아프다. 다시, 잡초를 뽑는다.
언젠가 잡초와 잡초가 아닌 것을 어떻게 구별하냐는 물음에 듣는 이는 무심히 대답했다. 내가 키우고자 하는 식물 외에 모든 것이 잡초다. 만약 잡초를 내버려두면? 키우고자 하는 식물이 방해받겠지. 고추가 시들시들해지겠지. 상추가 볕을 못 받겠지. 감자와 당근이 자그마해지겠지. 무와 배추에 바람이 들겠지. 농지에 있는 양분을 질경이와 쑥과 민들레도 나눠 먹겠지. 바로 그걸 막으려고 하는 거란다. 그렇다. 질경이와 쑥과 민들레도 잡초다. 들꽃에도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는 잡초가 되어 버리는 건가요. 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는 알겠는데 인간이 채집만 하고 먹고 살 게 아니라면 여기서는 잡초로 봐야 한단다. 아까보다는 덜 무심한 답이었다. 폭신하고 까만 흙을 응시한다. 신발은 이미 흙 때문에 얼룩덜룩하다. 농사일을 할 때 고급 진 옷을 입는 사람은 없다. 작업복은 언제나 흔하고 버리기 쉽고 튼튼한 것들뿐이다. 목뒤는 태양이 시달려 시뻘게진 지 오래다. 갈비뼈를 타고 흐르는 땀 한 줄기가 간지럽다.
해가 좋아 오이도 토마토도 수분이 터질 듯 단단하고 탱글탱글하다. 과채 하나에도 환희가 가득하다. 집에 돌아가면 토마토 매실 절임을 만들어야겠다. 토마토 껍질을 벗긴 후 과채가 잠길 정도만 매실청을 붓는다. 그리고 냉장고에 딱 하루만 넣어두면 달큰하고 새콤한 여름 간식 완성이다. 오이와 토마토가 실하니 콩국수도 좋다. 콩물은 한 번에 두통 정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열기로 입맛이 없어질 즈음에 콩물에 얼음 몇 개 동동 띄우고 땡볕에서 수확한 오이와 토마토도 썰어 넣는다. 미숫가루처럼 그냥 마시기도 하고 소면을 삶아 넣어 식사를 하기도 한다. 초여름에는 집 앞문과 뒷문을 열어 바람길을 만들어 두면 에어컨 없이도 충분하다. 역시 시원한 콩국수와 차가운 토마토 매실 절임이 여름의 시작이다.
더울수록 무턱대고 단것보다 새콤함이 더해진 간식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새참으로 자두가 제격이지만 오늘은 없다. “토마토는 좋은데 토마토 줄기에서 나는 비린내는 싫어.” 대신 토마토 위에 설탕을 뿌린다. 얇게 저민 토마토를 여러 겹 겹쳐 한입에 넣는다. 혀끝에 스며드는 달고 축축한 여름 햇살. 설탕은 들판에 부는 산들바람 같은 것. 토마토에서 눈부신 풀잎 맛이 난다. “덥다. 더워 죽겠다.” 마지막 남은 토마토 조각을 한입에 쏙 넣는다. 농모를 벗자 땀이 잔뜩 낀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분다. 토마토를 싸온 도시락통 옆에는 아이스커피가 냉기를 뿜으며 득의양양하다. 아직 얼음이 살아 있다. 부추에 물을 붓던 것처럼 목구멍 안으로 커피를 들이붓는다. 식도부터 내장까지 몸 안에 지금 이 순간을 여념 없이 쏟아붓는다. 땀으로 시작해 목구멍으로 실감하는 계절이다.
정수리부터 엄지발톱까지 열이 안 오른 곳이 없다. 그나마 아이스커피로 식힌 숨구멍에서 잠시나마 차가운 숨이 나온다. 이번 숨은 땅으로 스며들 듯 꺼지다 어딘가로 흩어져 버린다. 울룩불룩 한 농포와 그 위를 덮은 녹색 작물. 바람이 불면 그 손에 쓸려 흔들리지만 단단하게 뿌리내려 쓰러지지 않는다. 물론 거치대로 꼿꼿하게 고정해뒀기 때문이고, 몇몇 개는 뿌리채소라 땅위 줄기가 그다지 길지 않으며, 애초에 쌈채류는 포자처럼 생명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일 발걸음으로 땅을 다져놓은 보람이 있다. 손목 보호대와 동전 파스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농사 메이트다. 손목에는 목장갑 자국이, 발목에는 양말 자국이, 팔 다리에는 풀 줄기에 쓸린 자국이 있다. “이야…. 몸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가 장난 아니네.” 몸이 점점 땅을 닮아 가고 눈빛이 점점 작물을 닮아 간다. 발가락을 오므렸다가 펴고 발목을 돌린다. 다리 근육이 단단해졌다가 풀어진다. “벌써 일어나? 우리 좀 더 쉬자.” 신발에서 볕내가 난다.
호미를 손에 들고 밭고랑 사이에 앉는다. 작물 사이사이 새싹처럼 자리 잡은 바랭이와 강아지풀을 뽑는다. 이름 모를 딱정벌레가 고랑을 따라 열심히 기어간다. 사방에서 매미 우는소리가 들린다. 해가 점점 길어진다. 땅에서 시간은 느리지만 순식간이다. 열기에 몸을 맡기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일이 이만큼 진척되어 있다. 그건 아까 머리 꼭대기에 있던 해가 지금은 산맥과 나란한 걸 보고도 알 수 있다. “해가 지는데도 덥네. 이제 밭고랑 하나만 남은 거지?” 땅은 해가 남기고 간 열기를 품는다. 여름은 더 그렇다. 그러니 더울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여름이 아니더라도 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언제나 덥다. 생명이니까. “열역학 뭐 그런 거야? 아냐. 자세히 설명하지 마. 들어도 뭔 말인지 몰라.” 생명에 열기가 없는 일은 없다. 생명 하나가 생명으로 존재만 해도 열이 나는데 하물며 키우고 돌보고 성장시키는 행위는 어떠할까. 창조하기에 열이 난다. 창조하지 않으면 열이 나지 않는다. 창조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늘린다는 것. 가능성을 늘린다는 것은 유기적이고 선택적이고 가변적인 새로운 생물체를 낳는다는 것. 모든 동물의 짝짓기는 열락과 계략에 의해 일어난다. 성적 쾌락은 본능이 아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든, 무엇을 탄생시키고 자라게 하든, 그것은 수 없이, 수천 번을, 언제 심고, 틔우고, 키우고, 수확할 것인지 고민하는 필요에 의한 산물이다.
요컨대, 모든 돌봄은 쾌락이 아니라 고심과 골몰을 위한 것이다. 사람이 식물을 키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사람이 사람을 키울 때도, 나 자신을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행위와 움직임이 불가결하다.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키우거나 쟁이질을 하고 이랑을 파고 비에 젖고 땀에 젖고 햇살에 젖는 그 모든 행위는 응당 사람의 몫이다. 걷고 뛰고 기고 눕고 뒹굴고 나가고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언제나 고통이 함께하지만 고난에 길이 있는 이유는 고통이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와 움직임으로 사람의 몫을 다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무더위와 고난과 고통은 응당 사람의 몫이다. 그걸 감당하지 싫다면, 또는 누군가가 대리해 주기를 바란다면, 어쩔 수 없다. 거부하는 만큼 굶을 수밖에.
“많이 힘들어? 비장하게 또 어딜 보는 거야.” 농무農務는 창조를 위한 것. 목구멍은 시원하고 이마는 햇살에 익는다. 인간을 위한 작물은 사람의 정성이 없으면 자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람의 몫이다. “이제 들어가자. 마지막 고랑까지 끝냈다.” 흙이 탈탈 털린 얇고 길쭉한 잡초가 포물선을 그리며 울타리 밖으로 날아간다. 설탕 뿌린 토마토, 시원한 아이스커피, 새초롬한 풀잎 맛. 모두 내가 수확한 것이다. 땅 위에 서서 태양을 지고 그 열기를 손에 담아 해낸 것이다. “내일도 나와야 되냐? 하루는 쉬어도 되지?” 그러니 감당하기 싫을 리가. 이렇게나 청량한 여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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