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무덤
나기연
구슬픈 계집의 혼은 가둬놔야 뒤탈이 없어. 선비는 깔딱 고개를 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하도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라 산에 홀렸나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이 길이 호환으로 향하는 길이던가. 선비는 신중을 기했다. 조금만 더 가면 문중에 다다를 수 있어 걸음을 재촉한 게 낭패였나 보다. 아버지께서는 큰형님께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성치 않은 몸으로 이 험한 산중에 들어가려 하셨다. 자식 된 도리로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어머니와 식솔에게 뒤를 맡기고 최소한의 짐만 지고 오른 것이었는데 큰 할아버님께 절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을 생각하니 이만한 불효가 또 없었다.
빨리 가는 게 능사가 아님이다. 하루 더 쉬고 짐을 정비한 뒤 길눈이 밝은 나귀쇠라도 하나 구하면 될 일이었다. 선비는 더 늦기 전에 발을 돌려야겠다 싶어 왔던 길을 돌아 보았다. 저 끝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하나가 등에 짐을 가득 지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귀와 선비가 올라온 그 길이었다. 지게가 노인의 신장에 두 배에 달해 언뜻 보면 노인이 지게를 진 것이 아니라 지게가 노인을 감싸 안은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헐떡이는 기색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비는 저것이 창귀려나 싶어 나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활은 등자에 묶어 놓았고 장도는 소매 안에 넣어 두었다. 저것이 진정 귀신이면 장도는 소용이 없을 것이며 사람 탈을 쓴 범이라면 활로 눈을 쏘아 맞추고 내달리는 것만이 살 길이렸다. 선비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안장을 점검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활을 묶어놓은 매듭을 풀었다. 곁눈질로 노인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이 어찌 울던가. 데구르르. 바람이 굴렀다.
내게 뭐 볼 일이라도 있수? 노인이 걷다 말고 물었다. 거리가 있어 호통치는 것처럼 들렸다. 말투에서 쿰쿰한 연륜이 느껴졌다. 선비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이상이 높았으나 언제나 몸보다 마음이 앞서고 세상 이치에는 눈이 어두웠으니, 기세는 좋으나 야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적어도 그는 용맹했다. 선비는 활에 청살을 메고 노인을 겨냥했다. 사람이냐, 귀신이냐. 사람이면 이름을 대고 귀신이면 썩 꺼져라! 노인은 청살을 앞에 두고 산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었다. 썩은 내가 났다. 그리 궁금하면 그 자리에서 기다려보지 그려? 선비는 그 말을 도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인은 새파란 청년을 도발할 생각이 없었으니 이런 게 세상 이치에 어둡다는 말이었다. 선비는 가까운 소나무에 나귀를 묶어두고 장도를 꺼내 노인을 기다렸다. 노인은 순식간에 산을 올라 선비 앞에 섰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학이 어찌 울던가. 바람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판단해 보면 어떤가. 자, 그리 긴장하지 말고 여기 앉아 보시게. 여기 이 길로 두 고개를 넘어 가파 지른 비탈길을 내려가면 자욱하게 펼쳐진 대나무 숲이 보여. 그 숲을 지나 조금만 더 내려가면 커다란 서낭당이 있는 마을이 나오지. 문제는 그 숲에는 몸이 집채만 한 지네가 살고 있어 호기심에 발을 들이면 절대 살아나올 수가 없다는 걸세. 고놈 성질이 얼마나 사나운지 한번 문 것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는데 그렇게 발견된 사체를 보면 살점이 푸른빛을 띈다던가. 군데군데 수포가 터져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시신도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게 뻔해 안에 있는 마을은 망해도 진즉에 망했을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지.
그럼 볼 일이 있어 가는 자들은 어찌 된단 말이오. 선비는 여전히 장도를 부여잡고 물었다. 노인은 새까만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깊은 산골 마을에 볼 일이 뭐가 있단 말이야? 반대지. 그 마을이 바깥에 볼 일이 있는 것이지. 노인의 입에서 썩은 내가 났다. 선비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이 혼몽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자네 학은 어찌 우는지 아나? 그 대나무 숲에는 학이 산다네. 하지만 지네를 잡아먹지 못하지. 구슬픈 계집의 혼을 먹으면 탈이 나거든.
선비가 휘청이다가 옆에 있는 고삐를 확 쥐었다. 나귀가 놀라 까무러치며 선비의 옆구리를 차버렸다. 선비는 그 힘에 장도를 놓치고 쓰러져 옆에 있던 소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노인은 공포에 질린 나귀를 풀어주고 기절한 선비를 챙겼다. 오늘 먹이는 이놈이렸다. 나귀는 노인을 피해 쏜살같이 도망쳤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저 아래서 대나무 숲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대나무 숲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약삭빠른 년. 노인은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선비를 내팽개치고 나귀를 쫓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친 나귀라도 잡아먹어야 했다. 대나무 숲은 병정같이 진군하여 기절한 선비를 에워쌌다. 끼긱. 거대한 지네가 대나무 틈바구니에서 기어 나와 선비를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 살짝. 절대 죽지 않도록. 선비는 잠시 눈을 떴다가 구렁이만 한 지네를 보고 다시 기절했다. 대나무숲은 별수 없이 청년이 다시 깨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대나무 위에서 학이 울었다. 지네는 몸을 웅크리고 대나무 숲의 냄새를 깊이 맡았다. 구슬픈 냄새가 났다.
두 고개 넘어 절벽이나 진배없는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면 폐허가 된 마을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다 무너져가는 서낭당이 하나 있었다. 서낭당을 모시는 무당은 옛적에 살해당한 자로 신을 모셔야 할 곱디고운 몸에 불경한 짓을 저질러 광에 유폐되었다. 서낭제를 물려받고 얼마 안 가 일어난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정을 저지른 젊은 무녀를 제당에서 끌어내어 공물을 모아두는 광에 가둬두었다. 무녀는 볏짚에 누워 생각했다. 이대로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서낭신께서는 세상을 날카롭게 보고 사람을 따스하게 품고 정情으로 말하고 인忍으로 행동하며 의義로 향하라 하셨지. 신과 인간을 잇는 자라 할지라도 사람은 사람, 사람의 덕을 따라야 한다며 무녀를 나무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무엇보다 제 몸이니 가장 소중히 여기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위해 정情도 인忍도 의義도 버려도 되는가. 그리해도 날카롭고 따스하며 덕을 위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그런 고민이었다.
계집년이, 마을 어르신들이 신령님, 신령님, 하고 대접해 주니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몸을 함부로 놀린 게지. 자네는 잘못한 거 하나 없네. 여기 침이네 뱉고 가세. 무진 아재는 마을 사냥꾼 중 제일 으뜸으로 사냥꾼 집단의 우두머리였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멧돼지 고기나 고라니 고기를 떼어 정성스레 공양을 드렸고 이 산이 우리네에게도 살 길을 터주기를 예와 효를 다해 기도드리던 사람이었다. 무녀가 무복을 입고 있지 않을 때도 길에서 마주치면 깍듯이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으며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바늘이며 가락지며 이웃 마을에서 산 물건 중 무어라도 손에 쥐여주며 신령님께 이런 위안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사람 좋게 웃었다.
이 마을의 서낭신은 생전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마을을 지켜 마을 입구에 좌정한 장군신으로 서낭신이 검과 활을 잘 쓰는 만큼 무녀도 그에 필적하는 검술과 궁술을 익혀야 했다. 무녀가 무복을 입고 칼춤을 출 때 서낭당에 잠들어 있던 신이 날붙이 소리에 잠에서 깨어 굿판에 내려오는데 이때 무녀의 활에 깃들어 마을의 정성을 가늠한다 하였다. 그리고 서낭신이 사람들의 정성에 만족하였을 때 무녀가 쏜 활이 과녁에 명중하니 마을 사람들은 이것으로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마을에서는 여자아이들 중 궁술이 뛰어난 아이를 골라 무녀로 키웠다. 모월 모일 또래 아이들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소녀가 신어머니의 양딸이 되었다. 무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익히고 칼춤을 추며 서낭신을 뫼실 준비를 하였다. 어린아이의 손에 굳은살이 가득했고 살이 찢겼다 붙어 곳곳이 흉터였다. 신어머니는 손수 딸을 가르치며 무녀의 도리를 익히게 하였다. 무녀의 무예 실력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여 궁술은 더 예리하고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서낭신을 모시는 이로서 약속된 시간 외의 훈련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직접 사냥을 하거나 또는 사냥하는 모습을 보거나 손에 직접 피를 묻힐 수 없었다. 무녀가 쏠 수 있는 것은 짚과 비단으로 만든 제의용 과녁뿐이었다.
무녀는 열다섯이 되던 해에 신어머니께 오방색 천이 달린 장도를 하나를 받았다. 신어머니는 이 칼로 마음에 드는 나무를 깎아오라 일렀다. 지시한 것은 그뿐이었는데 무녀는 알아서 뒷산에 올라 잘 자란 대나무 한 그루를 베어 오더니 몇 날 며칠 방에 틀어박혀 먹지도 자지도 않고 활을 만들었다. 대나무를 꺾고 굽게 하는데 힘이 보통 드는 게 아닐 텐데 무녀는 그 모든 것을 홀린 듯이 해냈다. 마치 대나무가 스스로 몸을 꺾고 굽어 무녀의 힘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무녀는 재료에 빠져들어 배고픈 지도 모르고 활만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활로 과녁을 쏘니 얼마나 멀리 있든 어디서 쏘든 쏘는 족족 명중이었다.
이듬해 무녀는 처음으로 혼자 서낭제를 올렸다. 신어머니 없이 혼자 제단 앞에 서서 촛불을 켜고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었다. 소리를 하다가 칼춤을 추고 가가호호 나와 서낭신께 인사를 올리게 했다. 작년 한 해 저장해둔 곡물과 겨울바람에 말린 육포를 바치며 마을의 안녕과 집안의 복을 빌었다. 신어머니 눈에는 서낭당에서 신이 일어나 굿판으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이곳의 대나무는 무녀에게 힘을 주었고 그들이 뿌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삶을 엮었다. 신어머니는 장군님께 부디 저 아이의 삶을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제 활을 쏠 때가 되었고 무녀는 과녁을 명중시켰다. 신어머니 없이도 모든 일이 순탄하다는 뜻이었다.
얼마 후 신어머니는 기력이 다해 눈을 감았다. 무녀는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제당이 잘 보이는 뒷산에 묘를 세웠다.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무덤이 옥에 갇힌 것 같이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매 계절마다 해를 가득 받고 자란 제철 과일과 나물을 해다 드려야지. 그렇게라도 노지의 볕을 가져다드리는 게 좋겠어. 그러나 무녀는 이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그날은 무녀가 공양을 드리고 밤늦게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뵙는 길이었다. 나이가 과년한데도 어머니의 빈자리는 늘 허한 법이었다. 달도 뜨지 않아 대나무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리던 날, 무녀는 괴한에 의해 목이 졸려 기절했다.
눈을 뜨니 온 마을에 무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식이 퍼지자마자 무진 아재가 제일 먼저 무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무녀가 더 이상 활을 잡을 수 없도록 손가락을 부러트리고 장을 지졌다. 사냥꾼 집단의 우두머리인 그가 나서 그간 무당집이 너무 폐쇄적이었던 게 문제라며 앞으로 마을에서 공동으로 제를 지내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혹시 아냔 말이야. 이전 것들도 무녀라는 지위를 이용해 자기 배만 불리고 본분은 나 몰라라 했을지. 씁. 이 사람아. 신이 매일매일 마을을 굽어살펴야 신이지, 정월에 한번 깼다가 다음 해까지 쭉 잠든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내 옆 마을에 가보니 거기에 용한 박수무당이 하나 있는데 신을 워낙 잘 모셔서 돌 밭이었던 마을이 일 년 만에 문전옥답으로 변했다는 거야. 그런데 이 마을은 원체 변하지를 않잖아. 내 그 무당에게 우리 마을은 이러이러 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더니, 그 치가 원체 무당은 음기가 강한 족속들이라는데 무예를 익힌다니 활을 쏜다느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 내 조만간 그쪽 박수무당을 한 번 데려옴세. 그렇지? 원래 그런 년들이었던 거야.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볼 때마다 공물이나 바치고. 저런 더러운 것들. 천인공노할 년들.
참 이상하지. 이 마을은 평지가 얼마 없고 땅에 돌이 많아 농사가 아니라 사냥으로 돈을 벌던 곳이었는데. 고개를 넘어 마을 장터에 육포와 가죽을 팔고 콩과 쌀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던가. 더불어 국궁을 만드는 기술이 좋아 알만한 사람들은 굳이 험준한 산맥을 넘어 찾아오는 곳이었다. 장군신이 좌정한 이곳은 무녀의 화살촉에 오복 만복을 담아 한 해에 박아 넣고, 화살 깃으로 날카로운 바람을 일으켜 만액을 쫓아내었지. 좌정한 신과 신을 모시는 무당이 정성을 다해 마을을 지키니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알음알음 입소문을 타고 돈복이 들어왔을 건데. 무녀는 본분을 다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재는 이리 헛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무녀는 광 안에 갇혀 마을의 오물을 받아내야 했다. 사람들은 오다가다 침을 뱉고 오줌을 싸고 피를 뿌렸다. 개중에는 몰래 떡이나 엿을 넣어주고 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고 나중에는 이런 동정도 의미가 없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밖에서 들려오는 조롱의 목소리가 누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녀는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에 뼈가 뒤틀리고 살점이 녹아내린 손을 비춰 보았다. 달빛을 따라 어릴 적부터 궁술로 마르고 단단한 팔이 빛났다. 눈을 감고 시원하게 날아가 과녁에 꽂히던 화살촉을 떠올렸다. 신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다스렸던 마음을 떠올렸다. 정情과 인忍과 의義.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안위.
며칠 후 마을에 박수무당이 찾아와 무녀가 갇힌 광에 불을 지르라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과 공포였다. 손을 장으로 지질 때보다 더한 고통이 무녀의 몸을 에워쌌다. 서낭신이 가르쳐 준 신의는 이때 불타버렸다. 신어머니가 가르쳐 준 도리도 이때 녹아버렸다. 모두 다 까만 재가 되었다. 그래도 무녀의 혼은 살기로 결심했다. 구천을 떠도는 한이 있더라도.
구슬픈 계집의 혼은 가둬놔야 뒤탈이 없어. 허주가 떠드는 소리였다. 무진 아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 마을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게야. 박수무당이 무진 아재의 등을 토닥였다. 옆에 있던 다른 남정네가 앞으로 제는 어떡하냐 물었다. 무진 아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차피 이 자들이 하던 게 뭐가 있어. 사냥도 우리가 하고 음식도 우리가 하고. 이 치들이 하던 게 때맞춰 활 쏘는 것밖에 더 있었는가? 무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냥도, 사냥을 보는 것도, 피를 묻히는 것도 금지된 이유를. 가둬둔 것이었구나. 묶어둔 것이었구나. 넘보지 못하게. 공격하지 못하게. 그러나 도망치지도 못하게. 어린 소녀에게 무복을 입혀서.
무진 아재는 박수무당에 말에 따라 무녀를 땅에 묻고 그 주변으로 대나무를 둘러 심었다. 악랄한 것들. 땅속 깊이 심어 어디로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수를 썼구나. 무녀의 무덤 위에서 학이 울었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무녀는 마르고 단단한 팔을, 날카로운 화살촉을 다시 갖고 싶어졌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열렬하게.
지네는 습하고 서늘한 곳을 좋아한다. 대나무 숲은 볕이 잘 안 들고 습기가 많아 지네가 살기 좋았다. 이파리가 바닥에 쌓여 흙이 축축해지면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지네가 흙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이 무녀가 지네가 되어 눈을 뜬 이유였다. 무녀의 원한은 지네의 독이 되었다. 마르도 단단한 팔은 지네의 갑주가 되었다. 날카로운 화살촉은 지네의 송곳이 되었다. 분노는 그렇게 지네가 되었다. 그러나 슬픔만은 지네가 될 수 없어서 대나무 위에 있는 학이 대신 울어주었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지네는 그것으로 마음에 위안을 삼았다.
지네는 그들이 보이는 족족 송곳을 박아 넣었다. 침을 뱉고 오줌을 누던 것들을 모조리 씹어 죽였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한 겹씩 탈피를 했다. 지네의 크기가 구렁이만 해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학은 구슬프게 울었다. 지네는 눈물이 없어 학이 대신 울어 준 것이다. 안쓰러운 것. 서글픈 것. 구슬프게도 사는 것. 학은 연민을 담아 울었다. 지네의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해가 뜨는 깔딱 고개에서 고개 두 개를 넘어가면 산맥에 가려 해가 들지 않는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주변으로 음산한 대나무 숲이 하나 있다더라, 거기에는 몸집이 집채만 한 지네가 살고 있으니 호기심에라도 그 안에 들어가면 지네 독에 당해 정신을 잃고 시신도 온전치 못하다더라, 하는. 마을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네는 마을의 혼을 잡아먹어 지네의 몸체에 가뒀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죽어서도 고통받으라고. 저승도 환생도 없이 질식하다가 썩어 문드러 사라지라고.
그렇게 한 두해가 흐르고, 강산이 변하고, 입 없는 소문은 골짜기에 잠들고, 마을은 폐허가 되어 사라진 즈음에서야 지네는 오래전 허주를 쓰고 무진 아재를 홀린 박수무당을 찾아다녔다. 그 무당은 죄 없는 사람을 농락하고 천지의 흐름을 비튼 대가로 악귀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지네가 움직이면 대나무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숲 위에 앉은 학은 박수무당이 가까워지면 데구르르. 데구르르. 하고 울었다. 그 길목에서 사람이 죽어나갔다. 고의는 아니었다. 대나무 숲에 지네의 독이 퍼져서 호기심에 대나무 숲에 발을 들인 인간이 거기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기 일쑤였다. 지네는 그저 정신 차리라고 한 번 살짝 문 것이 다였다. 정말 살짝 물었는데 거기에도 죽어버려 지네도 당황스러운 차였다.
박수무당은, 아니 이제 악귀는 대나무 숲에 쫓기면서 사람이 보이는 족족 잡아먹고 그들에게 뺏은 패물은 지게에 지고 산을 탔다. 악귀의 이는 악취를 내며 썩어 들어갔다. 제일 좋은 사냥감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혼자 여행길에 오른 젊은 남정네들이었다. 오만하고 탱탱한 것이 맛이 일품이었다. 아, 저 멀리 호환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새하얗게 질린 선비가 있구나. 나귀 하나에, 선비 하나. 오늘도 진수성찬이다. 악귀는 눈을 빛내며 웃었다. 썩은 내가 났다. 선비에게는 악귀를 알아볼 지혜가 없었다. 그는 악귀를 보고 호기를 부렸다. 용맹했으나 야무지지는 않은 사내. 악귀는 그를 잡아먹으려 했다.
선비가 눈을 떴을 때 사방이 대나무 숲이었다. 아까 있던 노인은 어디로 갔고 나귀와 짐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선비는 기억을 더듬었다. 꿈을 꾸었다. 구렁이만 한 지네가 자기를 깨우는 꿈이었다. 지네는 처음에는 죽지 말라고 호통을 치더니 나중에는 기절 좀 그만하라고 애원했다. 지네가 말을 할 리가 없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도 사람 같아서 선비는 다음에 눈 뜰 때는 정말 기절을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다. 선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나무는 선비가 멀쩡한지 확인하기라도 하듯 몸을 부딪히며 울었다. 선비는 저도 모르게 허공에 대고 나는 이제 괜찮소. 고맙소. 이제 떠나도 된다오. 하고 위로를 건넸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학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대나무 숲이 선비를 두고 어딘가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숲 사이로 봉분도 없는 무덤이 보였다. 선비는 가만히 앉아 대나무의 대이동을 지켜보았다. 구렁이만 한 지네가 대나무 사이를 기어다니며 꼬리를 흔들었다. 숲은 비탈을 따라 이동했다. 데구르르. 학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 학 치고는 울음에 물기가 많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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