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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연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거기에 여자가 있었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곳에. 갑자기 있었다. 여자는 우연히도 의도치 않게 어쩌다 보니 거의 0에 가까운 곳에 와버렸다. 압력의 변화가 없고 중력의 차이가 없고 열이 흐르지 않는 곳이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파동이 사그라든? 아무튼 그런 곳. 변화가 없는 곳. 그러나 이제 여자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층에 파문이 생겼다. 어떤 가능성의 길이 열렸다.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빛보다는 느리게. 그렇게 연루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자는 그걸 알지 못했다. 눈치채지 않았다. 구태여 머리를 쓰지 않는 것도 노력이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역학?’ 여자는 그런 것을 알아차리기에 존재가 너무 작았고 하찮았고 무엇보다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달렸나? 모른다.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여자는 기억해 낼 필요가 없었다. 이것만 알았다. 이제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다. 시작하지 않는다. 마무리하지 않는다.
겨우 이렇게만 사는데도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니 딱 그 정도만 하기로 했다.
이제 생각하기도 귀찮았다. 귀찮음을 이겨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많이 했다. 이름? 성명? 여자는 자기가 여자라고만 불리는데도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반대하고 실망하고 서운하고 탈진하는데 질렸다. 다 부질없었다. 여자가 무력해 할 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이 올랐다. ‘아무것도’하지 않는 것에도 에너지가 든다니. 여자의 피부를 덮은 서리가 물방울이 되었다가 다시 얼었다. 시간의 흐름이었다. 여자는 외면했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여차저차 그러한 이유로 루카가 이곳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 안녀엉.
머리에서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귀가 찢어질 거 같았다. 찢기고 먹먹한 음성이 들렸다. 마치 절대 뚫리지 않는 방화벽을 억지로 찢고 들어오는 것처럼 소리가 너덜너덜했다.
- 아. 미안 고통스럽지.
무언가 어깨를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쑥 뒤로 당겨지더니 사방이 하얀 공간에 나동그라졌다. 여자는 씹다 뱉은 껌처럼 끈적하고 납작하게 바닥에 달라붙었다. 이 역시 의지와 무관한 일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고개를 들려고 해도 고개가 바닥에 딱 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카펫처럼 엎드려서 머리만 데굴데굴 굴렸다.
루카는 별생각 없었다. 실은 모두 의지의 문제였다. 여자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미안 미안. 조금 버겁지? 원래 ‘거기’ 있다 오면 그래.”
아까보다 선명한 목소리가 여자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싶은 듯 납작한 등을 움찔거렸다.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고 싶어? 도와줘?”
여자의 몸이 한 번 더 움찔거렸다. 이제 숨 쉬는 것도 버거워졌다. 무거운 솥 덩이를 가슴에 얹어 놓은 기분. 여자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숨. 공기. 산소포화도. 궁금한 게 있는데, 태어나서 처음 하는 호흡은 들숨이에요, 날숨이에요? 이 질문은 한때 지식 사이트 질문 코너에서 생각지 못한 기발한 질문으로 유명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이제 막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초등학생이었다. 누가 숨 쉬는 걸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겠어요. 가장 기본적인 것에 의문을 품는 게 창작의 시작입니다. 창의적이고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겠군요. 답변에 칭찬이 줄줄이 달렸다. 이제 막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탐구하는 어린아이를 향한 따듯하고 힘이 되는 말들. 하지만 여자는 창의적이지 못한 어른으로 자랐다. 우울하고 피로하고 무기력한 어른이 되었다. 아무튼 정답은 들숨이었다. 여자는 어떻게든 처음 숨을 들이켜던 그날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지구에 태어나 처음으로 맛봤던 차갑고 비릿한 숨을. 그러나 소용없었다. 여전히 숨쉬기는 버거웠다.
“인식을 바꿔봐. 지금 네가 바닥이라고 생각하니까 숨이 막히는 거 아냐.”
여자는 아까보다 더 납작해졌다. 몸 위로 구슬이 굴러가도 막히는 부분 없이 쓱 움직일 정도로 판판해졌다. 종잇장처럼 딱 붙어서 위와 아래는 둘러볼 수도 없었다. 루카는 그런 여자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였다.
“답답하긴.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너 아까 어디 있었어? 고민 좀 해봐.”
여자는 아까 있던 곳을 떠올렸다. 새까맣고 고요한 곳.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거기서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어떻게 존재했던가? 여자는 어두운 밤하늘을 떠올렸다. 이보다 훨씬 과거에, 언젠가 숨 막히는 중력장 안에서 별도 달도 없던 완벽한 암흑을 본 적 있었다. 그 암흑이 너무나 완벽해서 여자는 별과 달을 싫어하게 되었다. 우연적이고 필연적으로 궤도에 자리 잡은 떠돌이. 완전한 어둠에 스크래치를 내는 방해물. 기생충 같은 것들이 정신 사납게 반짝였다. 별을 볼 때마다 눈알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불쾌했다. 그날부터 여자는 먹구름을 좋아하게 되었고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고 빛나는 생명력을 증오하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혐오하게 되었다.
근래에 여자는 최선을 다해 주변 것들을 원망하고 어둠을 갈망하다가 거의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스럽고 떠올리는 것조차 치욕스러웠다. 여자는 눈을 감고 뛰어들었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곳들 중에 가장 어두운 곳으로.
- 우주. 나는 지금 우주에 있는 거지?
여자의 몸이 서서히 부풀었다. 납작한 몸을 뼈와 신경과 살이 채우고 뜨거운 피가 돌았다. 공기가 다 빠져서 바닥에 떨어진 풍선에 공기를 주입하는 것처럼 빵빵한 인간의 형상이 되어 바닥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발을 딛고 섰다. 똑바로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자는 바닥이 아니라 오른쪽 벽에 발을 딛고 서있었다. 이 ‘사실’은 루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루카가 왼쪽 벽에 발을 대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는 검은 천으로 뒤덮인 소매 속을 뒤지더니 붉은색 찻잔을 꺼냈다. 그러고는 차 마시는 시늉을 하며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휘감고 있어서 차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디를 보고 있는 지도 확실치 않았지만 형체가 움직이는 뉘앙스를 보면 그러했다. 루카는 우아하게 일어섰다.
“이곳은 정육면체니까. 어디든 바닥이 되고 벽이 되고 천장이 되는 거지.”
이것이 바로 우주의 묘미 아니겠어? 루카는 붕 뛰어오르더니 여자가 딛고 선 바닥에 안착했다. 이제 루카도 여자와 같은 바닥에 발을 붙이고 같은 천장을 향해 서있었다. 루카는 붉은색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이제 내 바닥과 네 바닥이 같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루카가 여자에게 찻잔을 건넸다. 안쪽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텅 빈 찻잔을 손에 쥐고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너, 생각보다 남의 눈치를 보는구나? 나를 보자마자 네가 벽에 붙어있다고 생각하더라고. 내가, 왼쪽 벽에 서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루카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 그리워졌다. 아까 있던 곳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 조차도 어둠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눈에 거슬리는 별도, 달도, 태양도 없었다. 별인 척 움직이는 인공위성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열광하는 별똥별도 없었다. 여자는 신경 쓸 게 하나 없는 무無의 공간이 너무도 달가웠다.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 것. 이 얼마나 안락한 일인가.
여자의 얼굴이 달아오르자 루카는 여자를 달래며 말했다.
“뭘 또 이거 가지고 그래. 다시 보여줄게.”
루카가 벽을 톡톡 건드리자 하얀 공간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아무 존재도 없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아까와 같지 않았다. 무無의 공간이라서 느낄 수 있었던 안락함이 없었다. 아래에 판판한 바닥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자 벽이 만져졌다. 다리를 움직이자 걸을 수도 있었다. 정육면체 공간은 투명해졌을 뿐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여자는 안락했던 그 어둠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을, 즉 무언가를 느끼고 인식하는 걸 하게 되었다. 무無에서는 걷는 게 무언가, 관절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을 수 있었는데. 보이지 않으면 뭐 한단 말인가. 이렇게 손과 발에 느껴지는데. 실재하는 걸 알아버렸는데. 실존을 견딜 수밖에 없어졌는데.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있던 루카도 사라졌다.
- 사라진 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거지.
여자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 오, 맞아맞아. 그쪽. 나는 그쪽에 있어.
이번에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을 모르는 것처럼 안락했고 아무것도 없어 안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옆에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했다. 무엇이 불안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 우주를 떠다닐 수 없다는 것? 정육면체가 갇혀서 루카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는 것? 차라리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면.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면. 여자의 몸에서 열이 피어올랐다. 쿡쿡. 루카가 또 웃었다.
-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너는 돌아가야 해.
여자는 루카의 웃는 목소리가 기분 나빴다. 꼭 비웃듯이 쿡쿡. 재수 없었다.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 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다. 손에 붉은색 찻잔이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안에 검은색 물이 빙글빙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물의 마찰에서 빛이 나왔다. 여자가 손에서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찻잔은 손가락 마디마디 관절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손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붉고 까맣고 뜨거운 용암이 찻잔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점점 커졌다. 여자의 온 신경과 세포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뉴런과 호르몬, 나선형 유전자, 미토콘드리아와 미생물이 찻잔 안으로 휘말렸다. 지구의 중력장으로 하릴없이 빨려 들어갔다.
여자가 완벽히 찻잔 안으로 사라지자 붉은색 찻잔은 잠시 허공에 둥둥 떠다니다가 루카의 소매로 쓱 들어갔다. 루카는 찻잔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다시 벽을 톡톡 건드렸다. 정육면체 공간이 서서히 하얗게 변하더니 빛이 가득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루카는 허공으로 튀었다가 왼쪽 벽에 안착했다. 이제 왼쪽 벽이 루카의 바닥이 되었다. 루카가 발을 한 번 구르자 갑자기 책상과 의자가 생겨났다.
“일 하나 처리했네.”
루카는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며 휴식을 만끽했다. 이런 일은 100년에 한 번쯤 왕왕 일어났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고 이번도 그 숱한 일들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다음 사람이 오기까지 꽤 시간이 남았다. 루카는 기지개를 켜고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한편 여자는 폭우가 쏟아지는 야밤에 산속에서 눈을 떴다. 정신을 잃고 비탈길을 구른 건지 사지가 아팠다. 신경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어디 뾰족한 곳에 찔렸는지 왼손에 피범벅이었다. 발가락이 움직였다. 다행히 다리는 멀쩡했다. 피나는 왼손을 그러쥐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빛 한 점 없는 밤이었지만 돌아갈 곳이 선명하게 보였다. 여자는 폭우를 뚫고 집으로 돌아갔다. 너무 피로해서 깊은 잠에 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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