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의 별
나기연
태양계 저 끝 카이퍼 벨트의 초입에는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천체 하나가 명왕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었다. 정말 작은 위성이라 허블 망원경에도 잡히지 않았고 겉보기에는 우주에 떠다니는 흔하디흔한 먼지 덩어리일 뿐이었다. 위성은 태양계 끝자락에서 지구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아 사람들에게 적당히 기억되고 적당히 잊히기 좋았다. 위성의 이름은 ‘엑스트라'였다. ‘엑스트라'에는 천체 크기 반만 한 곳간에 하나 있었는데 이 건물의 이름도 ‘엑스트라'였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의 이름도 역시 ‘엑스트라’였다. 그러니 이건 ‘엑스트라’에 세워진 ‘엑스트라’에서 살고 있는 ‘엑스트라’의 이야기인 셈이다.
‘엑스트라’에 세워진 ‘엑스트라’는 네트도 공도 없는 텅 빈 체육관 같은 모양이었다. 앞뒤로 문이 하나씩 있었고 천장에는 환풍기 세 개가 윙윙 건조한 소리를 내뿜으며 돌아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문이 그렇듯 ‘엑스트라’에 있는 앞문과 뒷문에도 손잡이가 있었다. 손잡이는 사용한 지 오래되어 먼지가 소복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을 지도 몰랐다.
‘엑스트라’에 세워진 ‘엑스트라’에 사는 ‘엑스트라’는 겉보기에도 속보기에도 매우 평범한 인간들의 군상이었다. 이들은 각각 자기의 의자를 갖고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생긴 은색 철제 의자였다. ‘엑스트라’는 이 넓은 곳간에서 하릴없이 철제 의자에 앉아있다가 가끔 일어나 의자를 질질 끌며 걸어 다녔고 때가 되면 다시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여기서 의자는 ‘엑스트라’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모두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리’를 잘 챙겼다. 종종 주인 없는 의자가 보이기도 했지만 이미 자기 의자가 하나씩 있었으므로 누구도 텅 빈 의자를 탐내지 않았다.
빈 의자는 사람이 만든 작품 속으로 불려 들어간 ‘엑스트라’의 자리였다. 작품이 끝나면 ‘엑스트라’는 다시 똑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엑스트라’는 이야기 안에 아무도 모르게 등장했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소설이든 영화든 우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 우주에는 ‘이야기 세계관’이라는 새로운 시간선이 증축되는데 작가나 독자야 등장인물 정도로도 서사가 잘 흘러간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주인공만 있는 이야기는 우주 한복판에 덩그러니 떠있는 사람과 같아서 서사가 안정적으로 흘러가려면 그 주변을 받쳐줄 곁다리가 필요했다. ‘엑스트라’는 그 이야기에 드러나지 않는 대중, 군중, 지나가는 행인들이었다. 요컨대 창작은 인간 사회를 모방하므로 등장인물로만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으며, 반드시 우리가 인식하지 않아도 언제나 있는 ‘그들'이 있어야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이야기가 끝나면 시간선에는 등장인물만 남고 ‘엑스트라’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순간 눈에 띄지 않는 ‘엑스트라’는 ‘이야기 세계관’에 필요하지 않았다. 완료된 이야기는 더 이상 시간이 흘러가지 않아도 되는 데다 독자가 기억하고 희망하는 한, 등장인물은 ‘엑스트라’ 없이도 잘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엑스트라’는 시간선이 안정적으로 증축될 때까지만 세계의 공허를 채우는 역할이었다. ‘엑스트라’는 거기에 큰 불만이 없었다. 애초에 불평등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막 ‘엑스트라’로 돌아온 ‘누군가’가 이런 시스템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원체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평탄한 길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 하나가 파문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에이 씨. 또 여기네.’
그는 이미 서른세 번 즈음 이곳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면 익숙한 철제 의자에 앉아있었고 이놈의 의자는 발전하는 것이 없었다.
‘회사에도 경력이 쌓이면 의자든 뭐든 점점 더 고급 지게 변하던데.’
그는 방금 전까지 있었던 회사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젊은 본부장과 어리숙한 신입의 사랑 이야기였다. 여자는 본부장과 신입의 좌충우돌 사랑 이야기를 구경하며 매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엑셀 작업을 하다가 두 주인공이 위기와 풍파를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자 다시 이곳으로 불려왔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누군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는 주인공이라면 으레 갖고 있는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삭막한 사회를 변화시킬만한 비전도 없었고 한 인간과 눈부신 사랑에 빠지기는커녕 이목구비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이름도 없었다. ‘누군가’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는 공기처럼 서사의 빈틈을 메꾸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에 있든 없든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 한때는 창백한 불행에 점철된 ‘냉장고 속의 여자’조차 부럽다고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심미적 죽음은 필요에 의해 소비된 불행 포르노일지라도 ‘엑스트라’보다야 나아 보였다. 그러나 여러 작품에서 그 꼴을 보자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냉장고 안보다 더 정당하고 풍부한 것을 욕망했다. 모든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무얼 하는지 ‘누군가’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랑’.
‘누군가’는 철제 의자 위로 올라갔다. 그가 한발씩 의자에 올릴 때마다 신발과 철제가 부딪혀 캉캉 소리가 났다. 그는 등을 쭉 펴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엑스트라’가 돌아다녔지만 정확하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어떤 이야기도 길거리에 널린 엑스트라 하나하나를 인식하지는 않으니까. 인식되지 않더라도 그냥 그 길에 존재하는 게 ‘엑스트라’의 역할이었다. 얼핏 남자, 여자, 노인, 아이 같은 건 느낄 수 있더라도 눈 색이라든가 점 위치 같은 세세한 정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고민에 빠졌다. 얼굴도 못 알아보는데 도대체 누구와 사랑에 빠진단 말인가. 그는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넓고 황량한 체육관에서 공허하게 휭휭 돌아가는 환풍기의 메마른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걷어찼다. 철제와 바닥이 맞부딪히며 환풍기 아래로 날아갔다.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도 ‘엑스트라’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그 꼴을 보며 크게 한탄했다.
“나도 다른 거! 하고! 싶다!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라!”
‘누군가’의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왕왕 크게 울렸다. 환풍기 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던 곳에 얇고 신경질적인, 그리고 울화가 치미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一 쾅! 쾅! 으헉!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웬 인영 하나가 천장을 뚫고 코앞으로 떨어졌다. ‘누군가’는 위를 한번 올려다봤다가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환풍기 하나는 박살 나서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박살 난 건 환풍기 뿐만이 아니었다. 대충 서른세 번 즈음 ‘누군가’와 생을 함께했던 철제 의자도 낯선 인영에 깔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사람은 연신 기침을 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천장에 한번, 철제 의자에 한번, 차가운 바닥에 한번. 총 세 번에 걸쳐 충격받은 몸뚱이가 제법 아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아프든 말든 ‘누군가’가 알 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했다.
‘씨발. 내 의자.’
“넌 뭐야.”
“넌 뭔데.”
‘누군가’는 으레 주인공이 한다는 것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소유물이었던 의자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은색 철제 의자는 ‘엑스트라’의 상징이었다. 주인공이 하는 걸 해보고 싶다는 뜻이었지 ‘엑스트라’가 아니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그는 ‘엑스트라’로서 다른 인물을 때려본 적도 없고 맞아본 적도 없었다. 그런 건 조금이나마 비중 있는 이들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엑스트라’는 정말이지 주인공에게 맞고 떨궈지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길가의 돌멩이 같은 존재들이었다. 발에 채지도 않는 무미건조한 돌멩이. ‘누군가’는 그 돌멩이 중에 조금 더 자의식이 있고 선택을 할 줄 아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누군가’는 어쩌면 주인공의 조건이란 ‘사랑’같은 게 아니라 ‘다른 인물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자율성’이 아닌가 하는 타당한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하는 ‘사랑’의 핵심은 ‘사랑한다’가 아니라 또 다른 인물의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는 자격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순차적으로 깨닫자 ‘누군가’는 이 세계의 본원적 진리를 깨우친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며 심장에서 주체할 수 없는 박동이 터져 나왔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앞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 지 알 거 같았다. ‘개입하기.’ 그는 어렵지 않게 다른 삶에 개입할 첫 번째 방법을 찾았다.
‘패자.’
‘누군가’는 자기 철제 의자를 깔아뭉개고 사과 한 마디 없는 인간을 빤히 바라봤다. 숱하게 구경했던 폭력 중 가장 흔하고 잘 쓰이는 클리셰는 무엇인가. ‘누군가’는 어머니가 딸에게, 형님이 아우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행하는 가장 흔하고 애정 어린 스킨십을 떠올렸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아 두개골을 쪼개겠다는 마음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유려한 손목 스냅으로 낯선 이의 머리를 후려쳤다.
“악! 뭐 하는 짓이야?!”
인간이 비명을 질렀지만 ‘누군가’는 태어난 이례 처음으로 누군가와 닿았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번 더 후두려 팼다. 그때마다 들리는 외마디 비명이 듣기 좋았다.
“악! 악! 뭐야! 이 미친 여자야!”
“오. 내가 여자야?”
‘누군가’는 자기가 여자로 보인다는 사실조차도 지금 처음 알았다. 당연했다. ‘엑스트라’에는 거울 같은 게 없었으니 ‘누군가’는 다른 ‘엑스트라’의 형태만 대충 유추할 뿐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 ‘누군가’의 볼에 홍조가 돌았다. 그건 설렘이었다. 눈앞의 인간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누군가’의 손목을 잡아챘다.
“미쳤냐고! 왜 때려?”
“너는 제정신으로 내 의자 깨부수고 천진한 거니?”
‘누군가’는 인간에게 잡힌 손을 굳이 빼지 않고 말했다. 인간은 뾰로통하게 입을 부풀리더니 중얼중얼 말했다.
“그건…. 미안해. 떨어지느라 정신이 없었어. 여기 이게 네 의자야?”
인간은 박살 난 철제 의자를 슬쩍 보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저기 빈 의자 많은데? 그냥 그거 가져. 뭘 의자 하나 가지고 그래.”
‘누군가’는 손을 돌려 손목을 빼내고 자기가 인간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인간이 ‘누군가’에게 손목이 잡힌 상태였다. '누군가'는 그대로 박치기를 했다. 머리를 박자 눈물샘에서 물이 찔끔 흘렀다. 이렇게 눈물을 흘려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모든 것을 깨우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아픈 게 폭력인 거야. 이거 살맛 나는데?’
‘누군가’는 인간의 손목을 놔주었다. 인간은 그대로 이마를 부여잡고 쓰러져 바닥을 뒹굴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이름이 필요한 거 같아.’
‘누군가’는 코를 훌쩍이는 인간을 보며 말했다.
“너 사람 이름 좀 지어봤어?”
인간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내 이름 좀 지어 봐.”
인간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그 반응에 흡족해하며 손을 놔주었다. 사실 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지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지금을 해내야 했다. 그는 지잉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는 어때?”
“그게 무슨 뜻인데?”
“알파벳 A. 가장 앞에 있잖아.”
“뭐야. 별로야.”
인간은 눈앞의 여자는 살펴보았다. 흑단 같은 머리칼에 자로 잰 듯 정확한 칼 단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엘리스…?”
“엘리스?”
“응. 엘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엘리스. ‘거울나라의 엘리스’의 엘리스.”
‘누군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마음에 든 듯 해맑게 웃었다. ‘누군가’는 ‘엘리스’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엘리스의 미소를 본 인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엘리스는 인간이 그동안 본 사람 중 가장 미친 사람이었지만, 애초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난 게 처음이기도 했다. 엘리스가 인간에게 물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인간은 대답했다.
“톰. 톰이야.”
“좋아. 톰.”
엘리스는 그렇게 처음으로 누군가를 불러보았다.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가 대답을 하는 이 상황에 속이 간질거렸다.
“톰. 나한테 인사해 봐.”
“아.. 안녕. 엘리스!”
톰은 잠자코 시키는 대로 했다. 엘리스는 기분 좋게 웃었다. 건조한 공기에 경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몇몇 ‘엑스트라’가 의자를 끌다 말고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좋아! 의자 깨부순 거 정도는 용서해 줄게!”
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엑스트라’에 세워진 ‘엑스트라’ 안에 사는 ‘엑스트라’의 공간에는 이름을 가진 두 존재가 등장하게 되었다. 엘리스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어 보이며 자기 이름을 부르다가 톰의 이름을 부르다가 톰이 대답하면 까르륵 웃었다. 톰은 눈을 껌뻑였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그럼. 톰 너는 어디서 왔어?”
어디서 왔냐고? 톰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기 위한 문장을 생각해 보았다. 역시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멸망한 세계에서 왔어.”
톰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 세계에 홀로 살아가는 남자였어, 난. 살아있는 거라고는 대지를 뒤덮은 칡과 바퀴벌레밖에 없었어. 외로운 곳이었어. 톰의 이야기를 듣던 엘리스가 말했다.
“정말로 네 주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단 한 명도?”
“단 한 명도. 외롭고 쓸쓸했지.”
“여기는 어떻게 왔는데?”
“나도 몰라. 다리를 건너던 중에 갑자기 다리가 무너졌어. 그러다가 콘크리트 파편에 머리를 맞아서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다 떨어지니까 여기잖아.”
엘리스는 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먼지가 쌓여 회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과 고동색 눈. 높고 단단한 코와 얇은 입술. 오른쪽 볼 한 가운데에 점이 있었고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체격은 좋아 보였다. 혼자여도 잘 살아남았을 거 같았다.
톰도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의 퍼석해 보이는 흑색 머리칼과 부유하는 먼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톰은 자기가 있던 소설 속에 이런 사람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그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대부분의 ‘엑스트라’가 둘을 보고 있었다. 엘리스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톰은 낯선 시선을 의식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톰이 말했다.
“저 문은 뭐야?”
뭐가? 엘리스가 톰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 저건 앞문. 뒷문도 있어.”
“나가봐도 돼?”
“나가?”
“응.”
“해본 적 없는데.”
엘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불특정하게 작품 세계로 날아갔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한 번도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을 못 했다. 그런 선택지가 있는 지도 몰랐다. ‘문’이라는 단서가 아예 머릿속에 없었는데 톰이 말하자마자 앞과 뒤를 장식했던 문을 열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켰다. 엘리스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
“좋은 생각이야. 톰!”
엘리스는 금세 앞문으로 달려가 여닫이로 된 대문 앞에 섰다. 문고리에는 별다른 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특별히 잠겨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자물쇠도 없었다. 엘리스는 손잡이를 돌리려고 했지만 거대한 대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녹슬었나 봐.”
톰이 꺼슬꺼슬하게 굳은 여닫이문의 틈새를 보더니 말했다.
“이걸로 녹을 갉아내면 열리지 않을까?”
“오.”
톰에게 부딪혀 박살 난 철제 의자의 파편을 보이며 톰이 말했다. 엘리스는 그 파편으로 문틈을 갉기 시작했다. 새살에서 딱지가 떨어지는 것처럼 갈색으로 굳은 녹이 조금씩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녹을 긁어내릴수록 파편을 쥔 손이 뻐근해졌고 어쩌다가 손가락에 녹슨 철이 스치면 살갗이 베여 따가웠다. 하지만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몸이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스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같은 부분을 내려찍고 긁어냈다. 엘리스가 어느 정도 녹을 갉아내자 톰이 다음 타자를 이어받았다. 톰은 엘리스처럼 같은 부분을 긁어내다가 녹이 웬만큼 사라지자 손잡이로 타깃을 변경했다.
그 뒤로 둘은 서로 돌아가며 문에 붙은 녹을 처리했다. 이마에 땀에 송골송골 맺히고 솜털을 따라 땀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짧은 파열음과 함께 대문이 끼익하며 열렸다. 이제 완전히 문고리를 돌려 나가면 그만이었다.
엘리스는 파편을 꽉 쥐고 있느라 굳은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힘을 주고 앞문을 활짝 열었다. 사막처럼 고요한 천체의 표면이 보였다. 깜깜한 우주 저 멀리 불타는 태양이 태산처럼 떠올랐다. 엘리스는 겁도 없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닥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우주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웠고 환상적이었다. 엘리스는 지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는 떠날 때였다. 엘리스는 톰을 한 번 돌아본 후 맑게 웃었다.
“나는 지금 가려고. 너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톰은 당황해서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활짝 열린 대문 안에서 ‘엑스트라’가 웅성거렸다. 원체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평탄한 길에 툭 튀어나온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몇몇 ‘엑스트라’가 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대문 가까이 다가왔다. 엘리스와 톰은 고요하고 차가운 우주 속으로 빙글빙글 빨려 들어갔다. 왜 행성이 둘의 궤도를 따라 공전했다. 천체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태양 주위를 돌았다. 이제 엘리스와 톰은 작가가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궤도를 찾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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