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파랑, 파랑,
나기연
소녀에게는 첫사랑 언니가 있다. 문제는 첫사랑 언니에게도 첫사랑 언니가 있다는 점이다.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것처럼 첫사랑 언니는 첫사랑 언니고 첫사랑 언니의 첫사랑도 첫사랑 언니다.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울지는 않는다. 언니가 우는 대신 뭐라도 하라고 조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언니보다 일찍 태어날 수는 없었잖아. 내가 언니의 첫사랑이 되겠답시고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잖아. 언니는 고백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한 뒤에 하는 게 고백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어? 언니가 몰라도 하라고 했다. 붉게 상기된 표정이 마음을 콕콕 찔렀다.
“네가 아직 소녀야? 청승 떨지 마.”
“스무 살이면 충분히 소녀지.”
나는 술을 만들면서도 언니를 생각한다. 블루 큐라소가 들어간 칵테일은 상큼한 맛이 난다. 구름을 만들고 싶어서 우유를 넣었는데 지거에 있는 우유를 그냥 부었더니 낙차 때문에 하얀 송곳처럼 잔에 꽂혔다가 사방으로 퍼져서 예쁜 하늘색만 탁하게 되었다. 앞에 있던 바텐더가 눈살을 찌푸린다.
“몇 방울만, 몇 방울만이라고. 그만큼만 넣어야 구름이 된다고.”
“쏟아부어도 구름이 되면 좋겠어.”
그냥 쏟아붓기만 해도 다 알아서 되면 좋겠어. 그러면 안 돼요? 바텐더는 질렸다는 듯이 등을 돌린다. 왜요오. 바 테이블에 엎어져 우는소리는 내본다. 이제 나가. 오픈 시간이야. 바텐더는 나의 친구였고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쫓아낼 때는 쫓겨나 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야 절연당하지 않고 오래 함께 할 수 있다. 이것도 언니가 가르쳐 줬다. 얌전히 쫓겨나 주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틈을 내어준다고. 언니는 공과 사가 확실했다. 같이 잘 있다가도 알람이 울리면 단호하게 나를 쫓아냈다. 그래도 언니의 첫사랑이 되고 싶었다. 그도 그럴게, 언니를 등지고 뛰어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언니의 표정만 궁금했는걸.
언니는 맨날 놀이터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파랗든 하얗든 모래바닥에 한참을 누워서 모래알을 손으로 굴리며 하늘을 구경했다. 우리 빌라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낡고 칠이 다 벗겨져서 노란색 페인트 너머의 비릿한 철제가 뼈를 드러냈다. 그네 두 개 중 하나는 한쪽 쇠사슬이 끊겼고 다른 하나는 멀쩡하기는 했지만 쇠사슬을 둘러싼 고무 커버가 다 헤져서 걸핏하면 손이 집혔다. 그곳은 어린아이들이 놀기에는 비위생적이었다. 부모들이 틈만 나면 놀이터 공사를 하라고 민원을 넣었지만 관리사무소장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고 그동안 아이들은 커서 더 이상 놀이터에 오지 않게 되었다.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은 단지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수목원으로 갔다. 거기에는 공원과 습지, 나무통 모양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놀이터가 있었다. 바닥이 폭신 고무 블록이 되어있는 수목원 놀이터는 단지 내에 있는 모래 놀이터보다 더 귀엽고 창의적이며 안전했다. 그네 끈도 고무 커버로 안전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곳은 이제 동내 양아치도 오지 않을 정도로 모양 빠졌고 길고양이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낡고 지친 곳이 되었다. 여기를 찾는 건 언니와 나뿐이었다.
언니랑 나는 가장 더운 낮 시간에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동네에 있는 유명한 떠돌이 할배가 우리를 미친년이라 욕했다. 어디 여자들이, 벌건 대낮에! 벌겋게! 모래바닥에! 나는 매번 그 할배를 때려죽이기라도 할 듯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던지려 했다. 그때마다 언니는 내 손을 잡고 나를 다시 뉘었다.
“너는 이해력은 좋은데 기억력이 좀 안 좋은 거 같아.”
언니가 말했다.
“저 할아버지는 우리한테 아무 짓도 못해. 저렇게 외치는 게 다야.”
언니는 저 할배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입만 나불거리는 인간인지, 사실 우리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다 알고 있었다.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우리는 이 대화를 놀이터 바닥에 누울 때마다 했다. 지하야. 누워. 하늘 봐. 나는 다시 누워 하늘을 보았다. 빛나는 하늘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언니만큼이나 자세히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밤하늘도 아니고. 벌건 대낮에. 눈이 부셔서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언니는 각막을 공격하는 햇살을 이겨내고 눈꺼풀을 들어 올려서 하늘을 응시했다. 나는 하늘을 본 게 아니라 하늘에 못 박혀 있는 언니의 시선을 보았고 하늘을 견디듯 굳건한 그 얼굴을 응시했다. 언니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숙제 내줄게. 하늘이 파란 이유를 찾아와 봐.”
하늘? 그제야 나는 파랗고 하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햇살 때문에 눈앞에 벌레 같은 게 기어다녔다. 나에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언니가 말하면 홀린 듯 해냈다.
그날 나는 학교에 돌아가 선생님한테 왜 하늘이 파란지 물어보려고 종례 시간만 기다렸다. 이런 걸 물어볼 친구는 없었다. 물론 책을 찾아봐도 되었겠지만 나는 글을 읽는 게 약했다. 같은 말도 글로 읽는 것과 사람이 직접 설명해 주는 건 차원이 달랐다. 글은 언제나 종착지가 이상했다. 검은 활자를 따라가다 보면 하얀 종이에 묻은 잉크 번짐이 보였고 그걸 닦아보려고 손을 문대면 손끝에 있는 거스러미가 보였고 거스러미를 뜯으려고 입으로 가져가면 갑자기 아침에 이를 안 닦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읽기’의 끝이 지적 깨달음이라거나 영혼의 성장이 아니라 잇몸 사이사이에 낀 찝찝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직접 설명을 해주면 그건 가만히 잘 들었다.
오후 내내 하늘이 파란 이유를 생각하느라 창밖만 바라봤다. 다른 선생님은 ‘왜 지하가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지?’라며 스치듯 넘어갔다. 머릿속에는 선생님에게 하늘이 파란 이유를 빨리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7교시가 끝나고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내려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선생님의 뒤를 밟았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선생님을 먼저 찾아간 날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내 질문을 듣더니 물리 선생님께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런 건 혜영 쌤이 더 잘 설명해 주실 거 같은데?”
“그냥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면 안 돼요?"
하하. 지하야. 선생님이 난감하다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잊은 거 같은데 나는 국어 선생님이야.”
“아.”
담임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모든 걸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선생님이랑 사담은 전혀 나누지 않아서 선생님은 다 모든 걸 알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내 학교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학교에 있는 구성원과 어우러지는 걸 못했지만 특히 선생님에게 찾아가는 걸 어려워했다. 선생님이랑 대화를 할 때마다 기가 죽어서 나도 모르게 몸이 수그러들었고 목소리도 동굴로 파고들듯이 작아져서 매번 선생님이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다시 반문해야 했다. 웃기게도 선생님이 반문할 때마다 기가 더 죽어서 대화는 언제나 유야무야 끝났다. 하지만 오늘은 하늘이 파란 이유를 알아가야 했다. 언니가 내준 숙제니까. 한 번만 더 용기를 내서 물리 선생님에게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전에 담임 선생님이 '저기! 고혜영 쌤!'하고 이목을 끌었다.
고혜영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의 부름을 받자마자 나를 자기 자리로 불렀다. 내가 하늘이 파란 이유를 묻자 선생님은 크게 기뻐하며 대답을 해주셨다. 반짝거리는 눈을 보니 거북한 마음이 들었다.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지…. 하늘이 파란 이유를 그림으로 그리며 설명하던 선생님은 내친김에 바다가 파란 이유까지 설명했다. 나는 뒤로 갈수록 나는 집중력을 점점 잃어서 나중에는 설명을 듣는 척하면서 선생님 이름표만 보았다. 고혜영(물리/3학년). 나는 이때 우리 학년 과학 선생님의 이름도 처음 알았다.
“또 궁금한 거 있어?”
“아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선생님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야! 또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와! 나는 더 빠르게 뛰었다. 언니가 보고 싶었다.
다음 날 나는 점심도 거르고 담을 넘어 놀이터로 뛰어갔다. 언니를 발견하자마자 더 빨리 달려 그대로 언니 위에 엎어졌다. 언니는 나를 조금 토닥이다가 옆으로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 언니 옆에 누웠다. 언니가 사람이 밀어낼 때는 얌전히 밀어나 줘야 다음 기회가 생긴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언니를 따라 반듯하게 눕자 등에 뜨끈한 모래가 닿았다. 언니는 눈을 크게 뜨고 파란 하늘을 망막으로 빨아들이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언니가 숙제 검사를 할 시간을 기다렸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언니가 물어보면 완전히 멋있게 대답해야지. 이 생각에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그러고 있기를 몇 분, 드디어 언니가 입을 열었다.
“왜 하늘이 파란지 알아왔어?”
“언니 그게 있지, 빛의 파장 때문인데. 해에는 일곱까지 빛이 다 들어 있어. 그걸 다 섞으면 하얀색이 된대. 햇빛은 기본적으로 무지개색 빛깔의 가시광선이 모두 섞인 하얀 빛인 거지! 이 빛이 지구에 올 때 공기에 부딪혀서 산란을 하는데 그중에 우리 눈으로 들어오는 게 파란색이래. 빨간색은 너무 파장이 길어서 우리 시야 밖으로 나가버리고 파란색이 파장이 짧아서 바로 우리 위치에서 보일 수 있게 꺾인대.”
나는 하늘에 손으로 빛의 파장과 해의 위치, 빛을 보는 사람의 위치를 그려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언니는 내가 설명하는 동안 내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며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끝나자 언니는 그렇구나,라고 말하더니 또 물었다.
“노을 진 하늘을 왜 빨개?”
“어…? 아마…. 어…. 해가 길어지니까 긴 파장이….”
“그럼 바다는 왜 파란데?”
“어…?”
“이제 바다가 파란 이유를 알아와.”
아. 어제 정신 차리고 설명 들을걸. 모래 위로 개미가 기어갔다. 개미의 페로몬을 따라 그다음 개미가, 그리고 또 그다음 개미가. 나뭇잎을 찢어 들고 나란히 걸어갔다. 삐리릭. 삐리릭. 언니의 알람이 울렸다. 언제나처럼 언니는 시간이 다 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가자. 나는 언니를 따라 바닥에서 일어났다. 머리칼에 자그마한 모래 알갱이가 붙었다. 언니가 내 머리와 등에 붙은 모래를 털어주며 말했다. 자. 뛰어. 이때부터 열심히 뛰어가면 5교시 종이 울리기 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니는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언니의 알람이 울린 뒤부터 쉬지 않고 뛰어야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어 그랬다.
“뛰어! 얼른!”
언니의 호령에 뜀박질을 했다. 발로 땅을 굴리고 학교 뒤편 낮은 돌담장 쪽에서 발돋움을 했다. 하늘이 훌쩍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바닥에 착지하면 학교 뒤편 분리수거장의 사각지대였다. 여기서부터는 풀숲에 숨겨둔 쓰레기통을 챙겨 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교정을 돌아 반으로 올라가면 끝이었다. 목에서 나는 구슬땀을 손으로 훔치고 숨이 차지 않은 척했다. 어차피 이 나이대 아이들은 내가 아니어도 항시 땀 냄새가 났고 숨이 가빴다. 아이들은 교실에 분리수거 통이 사라져도 알아서 일반 쓰레기통에 한꺼번에 버렸다. 언니를 만나기 위해 담을 넘는 날은 항상 이런 식으로 완벽했다.
또 하늘이 파란 이유를 검색한다. 그다음에는 바다가 파란 이유를 검색한다. 한 번만 더 검색하면 조금 오버해서 100번이 넘는다. 기억력이 안 좋아 탈이다. 이해력은 좋은데 이해한 내용이 열흘을 채 못 넘긴다. 하늘과 바다는 둘 다 빛의 산란 때문에 파랗다. 하늘은 빛이 공기 중에 부딪혀 산란할 때, 파장이 긴 붉은빛은 산란을 약하게 해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산란을 세게 해 낮 시간에 있는 우리에게 와닿기 때문에 파랗다. 바다는 파장이 긴 붉은빛은 산란을 적게 해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산란을 많이 해 물 분자끼리 부딪히다가 반사되어 파랗게 보인다. 때문에 공기가 파랗다거나, 바닷물이 파랗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빛 안에는 모든 색이 있으며 바다 안에는 빨간색이 잠들어 있다. 다만 파란색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이렇게 찾아보면 다 이해가 되는데 왜 나는 자꾸 잊을까.
“얼핏 아는 게 문제야. 그런 거지. ‘절제’라는 말이랑 ‘억제’라는 말이 용례로 보면 얼핏 알겠잖아. 하지만 정확히 구분해서 설명은 못해. 이런 게 얼핏 아는 것의 문제지. 기억력이 안 좋으면 될 때까지 반복해서 글을 써봐.”
“쓰면 뭐해. 읽지를 못하는데.”
“그래도 써. 쓰는 게 더 중요해.”
바텐더는 냉정히 말한다. 스무 살이 된 지금도 나는 설명을 미리 듣지 않으면 하늘이 파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시구도 수식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호감이었던 시구는 기억하기도 전에 증발하고 이해했던 수식은 적용하기도 전에 깨져버린다. 이토록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이라면 첫사랑쯤은 지금은 잊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본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투명한 유리잔에 보드카를 넣고 블루 큐라소를 붓는다. 원래라면 플루팅을 해서 보드카와 큐라소의 층을 나눠야 하지만 나는 그런 걸 잘 하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우유를 떠서 몇 방울씩 떨어트린다. 오늘은 조금 공을 들인다. 하늘색 수면에 뭉게뭉게 구름이 맺힌다.
“이번에는 구름 만들었네?”
바텐더는 유리잔을 닦으며 말한다. 나는 칵테일 잔에 있는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칵테일 바를 나선다. 상큼한 달달함은 혀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뜨거운 하늘은 식도를 오랫동안 태운다.
소녀에게는 첫사랑 언니가 있는데, 첫사랑 언니의 첫사랑도 첫사랑 언니라서 문제였다. 언니가 바다가 파란 이유를 알아오라고 했던 날, 나는 전날처럼 학교로 돌아가 종례시간까지 기다렸다. 이번에는 담임에게 찾아가지 않고 바로 물리 선생님에게 갔다. 어차피 담임에게 물어봐도 물리 선생님에게 찾아가라고 말했을 테니까. 선생님은 이틀 연속으로 하늘과 바다가 파란 이유를 물으러 온 학생을 과할 정도로 반가워했고 버거울 정도로 행복해했다. 금은보화를 다 가진 것처럼 웃어서 의문스러웠다. 선생님은 전날에 그려줬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며 바다가 파란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에는 끝가지 집중해서 들었다. 고혜영(물리/3학년). 선생님의 이름표에는 이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신기하지? 색이라는 건 빛이 산란하든 반사되든 우리 망막에 맺혀야 하는 거야. 파란빛이 공기나 물을 만나 산란하고 우리에게까지 와야 파란색을 볼 수 있는 거지. 이걸 조금 응용하면 왜 노을은 빨간 색인 지도 알 수 있겠지?”
노을이 질 때는 해가 멀어지는 때니까, 파장이 길어 약하게 산란하는 빨간색이 멀리에 있는 우리에게 닿을 수 있었을 테니까. 황혼에는 그림자도 길어지기 마련이고…. 하지만 나는 노을 진 언니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언니의 그림자는 항상 발에 짧동하게 매달렸다. 해가 강하게 뜨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니를 본 적이 없었다. 점심에 학교 담을 넘어 쉬지 않고 뛰어가야만 놀이터 모래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노을이 붉은 이유는 궁금해보지 않았다. 얼른 언니를 만나고 싶었다. 정오의 언니는 새하얗고 새파랗지. 황혼의 언니는 어떻지?
“지하야? 지하야! 괜찮아?”
내가 인사도 않고 뛰어가자 선생님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나는 뛰다가 뒤돌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선생님은 재차 확인하듯 ‘괜찮은 거지?’하고 물었다. 대답은 했는데 워낙 대충 대답했고 머리에 언니 생각밖에 없어서 제대로 들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학교가 끝났으니 정문으로 나가도 되는데 습관적으로 학교 뒤편 분리수거장으로 뛰었다. 분리수거장에 가려진 가장 낮은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놀이터로 향했다. 아직 하늘은 파랬고 구름은 없었고 손톱 같은 낮달이 있었다. 놀이터에 도착하니 언니는 끈이 떨어진 그네 말고, 조금은 위험하지만 멀쩡한 그네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학교에 나설 때까지만 해도 파랗던 하늘이 어느새 붉었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노을 진 언니의 얼굴을 보았다. 정오의 언니와 달리 황혼의 언니는 해를 이겨내려고 하지도 않고 버티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언니 앞으로 걸어가 해를 가리고 섰다.
“언니. 바다가 파란 이유 알아왔어.”
“그래?”
언니는 다리를 쭉 펴서 그네를 뒤로 밀었다. 끼익. 그네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녹슨 쇠사슬이 소리였다.
“누가 알려줬어?”
“우리 학교 물리 선생님이.”
“물리 선생님 누구?”
“고혜영 선생님.”
언니가 다시 무릎을 굽혔다. 끼익.
“알아?”
언니가 다시 무릎을 폈다. 끼익.
“응. 알아. 혜영 쌤.”
내가 다닐 때도 계셨어. 아직 계시네. 선생님을 떠올리는 언니의 표정이 노을에 비쳐 상기되어 보였다. 그리고 눈이. 그리고 눈빛이. 아. 소녀에게는 첫사랑 언니가 있는데, 첫사랑 언니에게도 첫사랑 언니가 있는 게 문제였다. 돌이켜보니 그랬다. 그럼 언니는 내가 고혜영 선생님한테 설명을 들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왜 하늘이 파란 이유를 알아오라고 시켰던 걸까? 거북스러웠던 선생님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라는 거야.”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언니는 비키라는 듯 내 발을 톡톡 건드렸다. 오히려 더 다가가 언니 앞에 바짝 섰다. 언니가 발을 밀어 뒤쪽으로 가면 나는 한발 더 다가섰다. 나는 여태껏 언니에게 고백한 적이 없었다. 언니는 태연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가 너무 나 같아서 눈치 못 챌 수가 없었는데. 애초에 고3이 점심마다 나 하나 보겠다고 오는데 어떻게 모르겠니.”
“언니.”
“고백하지 마.”
내가 움찔하자 언니가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다른 걸 해. 더 무언가를 해. 지금 이런 걸로는 안돼.”
언니랑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했다.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지루하고 고루한 세상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이상 세계 같았다. 내가 울려고 하자 언니는 울지 말라며 못 박았다.
“다른 걸 해낼 때까지 찾아오지 마.”
나는 미동도 하지 못하고 땅에 못 박힌 듯 언니만 노려보았다. 울지 말라고 하니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목이 꽉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그네에 앉은 언니를 끝까지 몰아붙여서 잡아먹을 것처럼 응시했다. 나와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상기되지 않았던 눈빛이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내가 뭘 해야. 뭘 할 수 있는데? 동네에 있는 유명한 떠돌이 할배가 술에 취해 우리에게 돌진했다.
“미친년들. 이 시간에도 있네.”
“뭐, 개새끼야?”
나는 곧장 할배를 향해 뛰었다. 이번에는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할배는 당황한 듯 뒷걸음치더니 엉성한 모양으로 도망갔다. 느리고 따분했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할배가 빌라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몰아내다가 놀이터로 돌아왔다. 언니는 없었다. 그네 혼자 끼익 끼익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언제 가도 언니는 없었다. 대신 그네에 이메일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만 꽂혀 있었다. 몇 번 메일은 보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메일은 읽는 거 같았다. 고혜영 선생님이 수업할 때는 최선을 다해 딴짓을 했다. 3학년은 금방 끝났고 나는 백수가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역에 있는 칵테일 바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사장님과는 금방 친해져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를 바텐더라고 부르며 건방지게 굴었고 그가 친절한 사장님에서 냉정한 친구로 바뀌기 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텐더는 나에게 칵테일 제조법을 알려 주었다. 그때부터 블루 스카이 칵테일을 연습했다. 결과물이 좋든 나쁘든 언니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매일 메일함을 확인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읽음] 표시는 항상 있었다. 나는 그걸 답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파랑, 파랑, 파랑, 언니에게 보낸 메일을 모아 보면 파란색 칵테일로 가득했다.
오늘 만든 블루 스카이 칵테일은 보드카와 큐라소의 층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면에 구름은 잘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사진을 찍지 않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뜨겁고 시뻘건 파랑 하늘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래도 언니의 첫사랑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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